[터치스크린]살인청부업 “그냥 일이니까”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제목 회사원

감독 임상윤

출연 소지섭, 이미연

제작사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영화사 심미안(주)

배급사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등급 18세 관람가

상영시간 96분

개봉일 2012년 10월 11일

임상윤의 <회사원>은 설정에 대한 자기 과신이 이야기의 가능성을 얼마나 훼손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와도 같은 영화다.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건 지금 시점에 살인청부 조직과 킬러 이야기를 회사와 직원의 관점으로 조명하겠다는 설정이 과연 영화의 명운을 걸 만큼 훌륭한 아이디어인가 하는 의문이다. <회사원>은 이와 같은 아이디어에 대해 분명히 과장된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덕분에 영화의 다른 부분들, 즉 캐릭터와 서사는 거의 유기되다시피 내버려져 있다. 가장 기묘한 것은 이 영화를 단지 재능 없는 제작진의 게으른 결과물로 치부하는 것 또한 공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영화 속에는 수없이 많은 ‘좌절된’ 가능성들의 자취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영화는 겉으로 평범한 수출 제조회사이지만 실제 살인청부업으로 유지되는 회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은 소지섭이 연기하는 영업2부 과장이다. 여기에는 그를 신뢰하는 보스가 있고, 그를 질투하는 상사가 있으며,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해온 주인공의 인생을 뒤흔드는 여자가 있고, 주인공의 단 한 번의 일탈을 파멸로 이끄는 배신자가 있다.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개를 거의 그대로 상상할 수 있으며, 영화도 그런 예상을 그대로 옮겨놓기에 바쁘다.

<회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킬러의 정체성을 직업인의 시각에서 조명하는 설정이 아니라, 조금씩 바뀌어 반복되는 대사, “일이니까”다. <회사원>에 애초 나쁜 놈들은 없다. 이 영화의 세계관은 개인의 선의를 신뢰한다. 다만 그 모든 선의와 도덕률에 앞서 모든 가치판단을 초토화시켜버리는 마법의 주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일이니까”다. 바로 윗 기수의 사수를 죽일 수 있는 것도, 나와 아무 상관없는 초면의 상대에게 총알을 박아넣을 수 있는 것도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업이 되는 순간 판단은 종료된다. 얼마나 충실하게 할 수 있는지만이 중요해진다.

언뜻 <대부>의 “단지 사업일 뿐이었다”는 폭력의 논리와 유사해 보이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는 또 다른 맥락을 갖는다. <회사원>은 보편적인 윤리조차 작동할 수 없도록 사고를 마비시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포장한 직업인으로서의 숭고함과 권능’을 드러내며, 서로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경쟁이 아닌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최대한의 경쟁으로써 이윤을 추구해야만 하는 현실의 체계를 지적한다. 아니 최소한 의지를 드러낸다. 유혈을 야기하는 최대한의 경쟁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상실되어버린 세계. 직장을 전쟁터로, 직장인을 전사로 비유하는 것이 이미 고루해져버린 사회. 즉 이 영화의 회사-직원 관계는 살인청부 조직-킬러 관계를 장르적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닌, 현실 자본주의 세계의 확장이다. 이 지점에서 <회사원>은 꽤 근사한 우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그런 가능성을 짓밟는다. 우화의 주인공이 되기에 소지섭의 캐릭터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동시에 이야기 전체를 전형적인 리얼리즘 드라마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관습적 장식품에 가깝다. 문제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우화가 아닌 제한적인 사실적 사건으로 풀어낼 경우, 이야기의 앞뒤가 거의 들어맞지 않고 과장되거나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터치스크린

나는 이 영화가 가진 우화로서의 좌절된 가능성을 보면서 몇 번씩이나 윤태호의 <미생>을 떠올렸다. <회사원>이 그 스스로 장점을 드러내기 위해 응당 성취했어야 할 것들을 <미생>은 빠짐없이 해냈다. <회사원>은 그냥 어정쩡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힘을 빼고 즐겁게 전개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를테면 후반부의 학살극 끝에 숨어 있던 사원에게 “퇴근하세요”라는 대사보다는 “영업부 아니죠?” “비품 빌리러 왔다가” 따위의 호흡이 훨씬 어울렸을 영화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는 설정에 파묻힌, 쓸데없이 비장하고 소란스러우며 너무 많은 이들이 이면지처럼 희생당하는 이야기로 귀결되고 만다. 안타깝다.

허지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