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칼럼]우리는 우리 길을 가야 한다

세계은행 자료를 기초로 해볼 때 1980년까지만 해도 북미 국내총생산(GDP)이 3조 달러에 달할 때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GDP는 7000억 달러에 불과했다. 1980년 당시 북미 인구는 2억5000만이었고,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인구는 13억이었다. 개인으로 비교하면 당시 북미 경제가 동아시아와 태평양 경제를 합친 것보다 24배는 컸다는 뜻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아시아와 태평양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전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여 왔다. 금융위기가 극심했던 2011년을 기준으로 보면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경제성장률은 8.3%로 같은 해 경제성장률이 1.75%에 불과한 북미를 4배 넘게 앞섰다. 노쇠한 북미 시장의 역동성이 떨어지는 가운데 아시아의 질주가 전 세계 경제성장을 견인한다. 이것이 현재 세계가 아시아를 주목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 경험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다.

1994년 정보통신산업 육성을 위해 발족한 정보통신부는 2008년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관련 부처로 기능을 이관하고 사라졌다. | 정지윤 기자

1982년 찰머스 존슨 교수는 일찍이 일본 통산성을 사례로 조사해 강한 국가, 훈련된 관료, 전략적 산업 육성이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소위 발전국가 모형을 발표했다. 이후 현재 버지니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우정은 교수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동아시아 경제발전이란 퍼즐을 발전국가 모형이란 개념을 통해 설명하려 노력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유산이 한국과 대만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인적·제도적 기초가 됐다는 역사적 설명을 하는 이도 있다. 정부와 기업 간의 밀착된 관계를 통해서 산업 발전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연구자도 있다. 당시 국외 안보환경이 한국과 대만의 지도자로 하여금 경제성장뿐 아니라 군사력 강화 차원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게 했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외부의 안보·경제환경, 내부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동아시아의 발전국가가 설 수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 간에 지금껏 합의된 내용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동아시아의 발전 경험은 이러한 변수들을 충족시키지 않는 다른 지역에 쉽게 이식될 수 없는 발전 경험이란 것을 뜻한다. 한국식 발전 모델을 세계에 확산하자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논의는 구호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들 국가에 비해 필요한 것은 어설픈 수입산 지식이 아니라 현장의 경험이 공유·확산되고 축적될 수 있는 구조다.

동시에 이는 동아시아의 발전 모델은 지속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뜻한다. 신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보통신부를 미래창조과학부로 바꾸고 관련 부처 기능만 확장해 놓는다고 해서 정통부의 경험이 지금 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놓고 보면 과학적인 이해가 가능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맹목적인 후대를 하게 되면 잘못된 우상과 신화를 만든다. 1980년대부터 디지털 인프라 구축에 앞장섰던 한국의 경험을 복기하고 그 원인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고, 그 발전 모델의 가능성과 한계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 없이 무조건적인 답습 혹은 모방을 반복한다면 상상력의 빈곤에 다름없다. 그럴 듯한 이름보다 내실이 더 중요하다.

그건 우리의 경험뿐 아니라 남의 경험을 따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2010년에 국내에 출판된 이래 지속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창업국가’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댄 세노르와 사울 싱어가 공저한 이 책은 어떻게 중동의 분쟁지역에 위치한 이스라엘이 실리콘밸리보다 더 기술 창업이 번창할 수 있는 국가가 됐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스타트업 열풍이 불고 있는 한국에서도 이 책을 따라하고자 하는 열풍이 지난 몇 해 동안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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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국과 이스라엘이 닮은 점도 많다. 양국 모두 2차대전 이후 건국된 국가다. 주변 강대국 사이에 끼인 국가다. 전폭적인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간략히 비교해 봐도 두 국가간에 차이점 역시 많다.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중동지역에 비해 아시아지역은 한국전쟁 이후로는 큰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또한 최근에서야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나타나는 중동지역과 달리 아시아지역은 1980년대부터 작고한 하버드의 정치학자 헌팅턴이 말한 제3의 물결을 경험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아시아지역 국가간의 경제적 상호 의존도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노력은 베낄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환경은 복제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발전국가와 창업국가를 넘어 우리의 대내외 현실을 직시한 우리 길을 가야 한다.

김재연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