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칼럼]한국 IT산업의 숨겨진 동력

1982년과 1997년은 한국 IT산업의 전환점이다. 1982년은 한국 IT산업 발달의 효시가 된 국산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이 착수된 해다. 당시 한국의 전화보급률은 7.2%밖에 되지 않았다. 이자를 주고 전화기를 빌려 쓰거나 이웃끼리 나눠 쓰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1990년에는 전화보급률이 약 31%로 증가했다. 국산화로 수입 대체 효과가 발생했고,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대체된 덕분에 설치·운영 비용이 크게 절감됐기 때문이다. 전화 보급 속도는 같은 시기 전 세계에서 가장 빨랐고, 이 디지털 인프라는 팩스 등 다른 데이터 통신의 기초가 됐다. 한국은 1980년대에 디지털 전화 인프라 구축에 성공하면서 IT 선진국으로 진입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됐다.

1997년은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의 국제 표준이 된 브로드밴드에서 다른 국가들을 앞서게 된 기점이다. 한국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자인 두루넷이 본격적으로 브로드밴드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하나로가 경쟁에 합류했다. 한국의 브로드밴드 가입 비율은 1998년 0.03%에서 2011년 36.9%로 증가했다. 2010년 하버드대 버크만센터에서 내놓은 전 세계 브로드밴드 현황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과 세계 선두를 다투는 국가다.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고 상용화하기에 유리한 여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1980~1990년대 전화보급률 향상에 기여한 국산 전전자교환기(TDX). |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떻게 1982년, 1997년이 한국 IT산업의 전환기가 될 수 있었을까? 2003년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한국이 정보통신산업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정부의 전략적 투자 덕분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앞서의 버크만센터 보고서도 한국, 일본, 스웨덴이 통신 인프라 구축에서 앞서게 된 것은 GDP 대비 미국보다도 많은 정부 투자가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 이해는 왜 1982년, 1997년이 한국 IT산업의 전환기가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선 설명하지 못한다.

1982년과 1997년은 한국 사회가 큰 위기를 헤쳐나오던 시기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했다. 이 부작용으로 인플레이션 수치가 1980년 28.7%까지 올라갔다. 또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력 진압하며 정당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은 고도성장을 기록하던 한국이 외환위기에 직면한 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급진적인 경제개혁이 시작된 시점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정당성 위기를 겪고 있는 전두환 정권은 경제발전을 통해 정권의 명분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적당히 비공식 채널로 외국 제품을 베껴 시장에 내놓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자체기술 개발’이라는 새로운 개발 이념이 부각됐다. 자체기술 개발안은 그동안 장기 투자를 회피한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가로막혀 왔지만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두 세력의 조합으로 자체기술 개발을 통한 국내 전화 인프라 디지털화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1997년도 민주주의와 경제위기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IT산업 육성을 통해 경제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IMF사태 이후 방출된 대량의 연구인력들이 정부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과 기업 R&D 연구소의 주축을 담당했다. 시장 역시 IMF의 압력으로 급격히 개방됐다. 두루넷은 한국전력의 케이블 인프라를 통해 시장에 뛰어들었고, 하나로도 브로드밴드 시장 참여가 허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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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단순한 정부 개입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경제위기가 한국 IT산업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경제발전을 요구했고, 경제위기는 예전 방식을 답습하는 것만으론 경제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줬다. 이러한 정치적 인센티브가 한국 IT산업의 숨겨진 동력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IT강국 신화’보다 더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김재연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