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랑에 운트 죄네, 랑에 1 - 사람의 손이 만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시계

현대 고급 손목시계를 얘기할 때 스위스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종주국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시계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탈리아·영국·프랑스·독일, 그 다음이 스위스다.

즉 유럽에서는 비교적 늦게 시계 제조를 시작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이 끊임없는 전쟁과 내란으로 중간에 시계 제조사의 명맥이 끊기는 일이 잦았다면, 오래 전부터 평화롭고 정치적으로도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는 기계식 시계처럼 섬세하고 전통이 중시되는 작업을 하기에 최적의 요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부터 세계 고급 시계의 지형도가 약간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스위스가 시계의 상징적인 메카로서 부동의 위치에 있긴 하지만, 그 주변국 특히 독일 시계산업의 비상이 눈부시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금속가공 분야에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랑에1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의 무브먼트(L082.1)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탱크나 잠수함, 전투기 같은 군수산업에서 그들 민족의 축적된 기술력을 증명해 보였고, 현대에는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 같은 업체들이 자동차 제조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독일은 시계 제조분야에서도 탁월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독일 민족 특유의 금속을 다루는 심미안을 바탕으로 담백한 디자인과 파워풀한 내구성을 지닌 부품들을 조화시켜 현대의 시계 애호가들을 열광케 하고 있다.

오늘 소개할 랑에 운트 죄네(A. Lange & Sohne)는 독일 시계를 언급할 때 단연 첫머리에 소개해야 할 독일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다. 매년 독일에서는 자국의 전 산업분야를 통틀어서 가장 브랜드 이미지가 좋고 럭셔리한 기업을 선정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하는데, 랑에 운트 죄네는 2000년대 중반부터 BMW나 몽블랑 등을 제치고 거의 매년 1위를 차지할 만큼 시계 브랜드를 넘어 독일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최고의 브랜드로 우뚝 섰다.

독일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브랜드
랑에 운트 죄네의 역사는 무려 1845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립자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는 독일 작센주의 작은 마을 글라슈테에 뿌리를 내렸는데, 이 지방은 예전부터 유럽에서 광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각종 금속류를 채취·제련하기 쉽고 무엇보다 숙련된 장인들이 많은 고장이었기에 아돌프 랑에와 그의 아들들(브랜드명 랑에 운트 죄네를 우리말로 풀면, 랑에와 아들이라는 뜻임)은 1세기 반 동안 대를 이어가며 독일 시계 역사를 수놓는 걸작 시계들과 수많은 발명들을 남겼다.

특히 2대인 리차드 랑에의 업적 중 돋보이는 건 새로운 헤어스프링을 개발한 것이다. 기존의 강철에 베릴륨 등 다양한 합금을 배합해 내구성을 비약적으로 개선시킨 랑에표 헤어스프링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거라고는 믿기 힘든, 그야말로 시대를 앞선 성취였다.

찬란한 유산을 자랑하는 랑에 운트 죄네였지만 2차 세계대전만은 피할 수 없었다. 패전 후 서독과 동독으로 나라가 분단됐고 공산권인 동독 쪽에 위치한 글라슈테 지방은 자연스레 시계와 관련된 모든 업체들의 명맥이 끊겼다.

하지만 1989년 냉전의 상징과도 같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이듬해 독일이 통일되면서 당시 서독에 살던 창립자의 증손자 발터 랑에가 바로 글라슈테로 돌아와 선대의 가업을 다시 일으켜세운 것이 지금의 랑에 운트 죄네가 존재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발터 랑에가 랑에 운트 죄네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선대에 제작된 각종 시계들과 기술 노하우가 적힌 방대한 서류 및 고서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 시대에 걸맞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시계도 선보여야 한다는 투지에 불탔다. 그리고 1994년에 첫 결실을 내놓았는데 총 4종의 시계 중 단연 돋보인 것이 바로 ‘랑에(Lange) 1’이었다.

랑에1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

랑에 1의 등장은 신선하다 못해 훗날에 미친 파급력이 대단했다. 특히 다이얼 중앙에서 벗어난 오프센터(off-center) 디자인에 시와 분침을 배열하고, 그 하단 6시 방향에 서브 다이얼로 초침을, 3시나 9시 방향에 파워리저브 표시 핸드를 두고, 다이얼 상단에는 큼지막한 더블 빅데이트(날짜창)를 위치시킨 그 형태는 일찍이 스위스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이렇듯 외적인 면에서도 당대의 고급 시계 디자인과 차별화된 아이코닉한 매력이 있었지만 랑에 1을 명품 중의 명품 반열에 올려놓게 한 숨은 공신은 바로 한 번 보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화려하게 장식된 아름다운 무브먼트에 있었다.

숨은 구석구석 세심한 수작업
랑에 운트 죄네의 무브먼트는 저먼 실버라는 고급스러운 광택을 내는 특수한 합금을 바탕으로 제작된다. 여기에 상단 플레이트를 4분의 2 분할로 나눈다. 그리고 내부 각종 휠을 고정시키는 상단 플레이트의 노출부 홀 주변을 둥글게 파내고 골드 소재의 샤통이라 불리는 링을 삽입한다.

이 안에는 또한 핑크색을 띠는 작은 루비가 채워지고 그 주변은 고열에 구워내 선명한 푸른색을 띠는 스크루들로 고정된다. 상하 플레이트 나머지 부분에는 잔잔한 물결이 퍼지는 것 같은 반복적인 동심원 형태의 페를라주(Perlage) 패턴이 음각되고, 각 모서리는 다이아몬드 페이스트 같은 특수한 도구를 활용해 사람이 일일이 부드러운 각을 다듬고 광택 처리를 한다.

또한 밸런스를 지탱하는 밸런스콕이나 브리지에도 섬세하게 아르누보 풍의 패턴을 새기는데, 이는 인그레이빙 마스터로 불리는 숙련된 장인의 손길을 빌린다. 무브먼트에 행해지는 이 같은 장식적인 요소들은 사실 무브먼트의 기계적인 성능과는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수세기 전부터 하이엔드 메이커들은 무브먼트의 숨은 구석구석까지도 마치 생명을 부여하듯 세심한 수작업으로 마무리했다.

사람의 손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계라는 평을 들으며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한 랑에 운트 죄네. 여러 대표 컬렉션 중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딴 랑에 1은 현대의 기계식 시계 애호가들로부터 가히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치밀하게 계산된 독창적인 디자인의 다이얼과 미려하게 가공된 케이스, 케이스백의 사파이어 글라스를 통해 드러나는 최상급 무브먼트의 화려함까지 랑에 운트 죄네의 시계는 구석구석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섬세함의 성찬이다.

역대 제작된 랑에 1 모델 중에서도 지난해 발표한 랑에 1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는 걸작이라는 수식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랑에 1 고유의 다이얼에는 시와 분·날짜·요일·월·문페이즈·윤년 인식표시 같은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들이 단정하게 배열돼 있다.

그리고 압권은 자체 개발한 오토매틱 칼리버 L082.1 안에 중력을 상쇄하는 투르비용 기능까지 추가한 것인데, 이 장치마저 여느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는 자체 특허 ‘스톱-세컨즈 메커니즘’을 적용해 보다 정확한 시간을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랑에 운트 죄네는 시계 제작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소량 생산체제로도 유명하다. 한 해 제작되는 시계 개수는 총 5000점 정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명품다운 희소성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독일 브랜드 특유의 엄격함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

분단의 아픔을 뒤로 하고 세계적인 명품 기업으로 우뚝 선 랑에 운트 죄네. 작은 시계 하나에도 전통과 혁신을 아우르는 진지한 노력을 듬뿍 담아내는 이들이기에 현대의 시계 애호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리라.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