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도로명 주소의 ‘도시행정 맹동주의’

열에 한둘은 참신하고 아름다운 작명도 있다. 사람살이에 따라 마을도 달라지고 길도 달라진다. 이름도 달라진다. 이번 도로명 개편으로 행정의 관점에서 얻는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라는 것이 길게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우리들의 집단적 기억이 말갛게 사라지는 것을 상쇄할 만한 것일까.

10년 전쯤 일산에 처음 이사왔을 때, 새로 살게 된 ‘강촌마을’이란 이름이 한강 때문에 생긴 줄 알았다. 강변 마을 말이다. 그런데 산책을 하다가 ‘강촌마을 유래비’를 보게 되었는데, 오래 전부터 이 일대가 진주 강(姜)씨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그 순간, 마음 한구석에 훈풍이 부는 듯했다. 일산이란 신도시 아닌가. 구릉이며 산자락이며 자연 부락이며 다 뭉개고 그 위에 네모 반듯한 아파트 단지를 우악스럽게 앉혀 놓은 줄 알았는데 상당한 녹지가 펼쳐진 데다가 마을 이름들이 이 지역의 오래된 기억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수로 한강 물이 불어나더니 상류에서 크고 하얀 돌이 떠내려 와서 마을 어귀에 걸려 멈추었으니 이름하여 백석동이라,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이성계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치다가 어느 절에 몸을 의탁하여 간신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이름하여 식사(食寺)동이라,

펑퍼짐하게 퍼져가는 한강 하류와 그 위로 떨어지는 일몰이 아름다워 신선이 내려와 머물렀으니 이름하여 강선 마을이라, 내 사는 마두동은 정발산에서 보건대 마을 전체의 형상이 마치 우람한 말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의 강석로(오른쪽).정윤수강원도 장성군의 비와야폭포길(왼쪽) / 정윤수

이렇게 마을 이름은 수백년 동안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 속으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마을들을 잇는 길 이름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궁리해보면 마을 이름이나 길 이름으로 그 곳의 지형과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다.

다시 일산 쪽을 예로 들면 문촌마을은 옛날에 서당이 있던 곳이라 그리 불려 왔고, 예부터 밤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사방에 밤가시가 널려 있다고 해서 붙여진 곳이 국립암센터 부근의 밤가시 마을이며, 한강 철책선 때문에 사람이 드나들 수도 없지만 법곶동이나 이산포 같은 마을 이름은 이 일대가 오랫동안 한강과 임진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음을 알 수 있다.

새 도로명 기억ㆍ설화적 분위기 지워
그랬는데, 얼마 전부터 내 사는 곳의 길 이름이 ‘강석로’로 변했다. 이번 설날에 정치 얘기며 부동산 얘기보다 더 관심을 끌었다는 ‘도로명 주소’에 의해 내 주소도 몇 음절 짧아졌는데, 강석로에서 몇 번째 있는 건물이라는 뜻이겠다. 그런데 왜 강석로일까.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송인 강석씨였는데, 설마 그럴 리는 없으므로 다시 찾아보니, 강촌마을과 백석마을을 잇는 길이라고 한다. 간편하고 효과적이긴 한데, 이렇게 됨으로써 진주 강씨 집성촌이라든지 하얗고 커다란 돌이 떠내려 왔다든지 하는 역사적 기억이나 설화적 분위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비단 이런 집단적 기억이나 전승 설화의 차원이 아니라 해도, 도로명 주소 때문에 곳곳에서 불만이 있다고들 한다. 세련된 부촌 이미지를 갖고 있는 청담동 대신 도산대로나 학동로를 써야 하는 주민들 혹은 큰 돈을 들여서 최고급 이미지인 강남이라 서초동 반포의 ‘래미안퍼스티지’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반포대로 275’로 바뀐 것이 도통 맘에 들지 않을 주민이 있을 것이다.

길을 쉽게 찾게 하겠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수선해진 곳도 있으니 양천구의 ‘목동로’, ‘목동 중앙·동·서·남·북로’, ‘목동중앙 본·동·서·남·북로’, ‘목동중앙본로 1~32길’ 등은 오히려 이렇게 옮겨 적는 것마저도 복잡하게 느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을의 역사와 지형이 새 이름 때문에 사라져버린 곳도 많다. 다시 목동을 예로 들면 ‘곰달래로’는 목동중앙서로가 되었고, ‘달마을로’는 목동중앙본로가 되었고, ‘모새미로’는 목동중앙로가 되었다. 새 도로명 주소에 가장 많이 나온다는 ‘중앙’이라는 단어가 오래된 마을 이름을 여지없이 관통해버렸다.

청라 국제도시에 가면 ‘루비로’, ‘크리스탈로’, ‘사파이어로’, ‘에메랄드로’, ‘라임로’ 같은 보석 이름이 펼쳐져 있으니 국제적이다 못해 해괴한 키치 수준이고, 송도 역시 ‘컨벤시아대로’, ‘하모니로’, ‘벤처로’가 이어진다고 하니 과연 국제도시다운 호연지기다.

군번처럼 바꾼 이름이 합리적일까
내 고향은 경북 영주다. 그곳에서 봉화를 지나 울진으로 가는 36번 국도는 쾌청한 바람과 울창한 소나무숲들로 장관이거니와 새 도로명 주소에 의하여 ‘파인토피아로’가 되었다.

이럴 수가. 소나무(Pine)로 유명하다지만 과연 그 경북 산간 오지가 천국(Utopia)일까. 게다가 고향 영주에 ‘테라피로’까지 있으니 유학의 본향이니 하는 자랑은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대구의 ‘테크노로’, 보령의 ‘머드로’, 진도의 ‘웰빙길’도 어리둥절한 작명이다.

아, 물론 열에 한둘은 참신하고 아름다운 작명도 있다. 보름 전에 특강을 하러 강원도 태백에 갔다가 내친 김에 철암이며 장성 쪽으로 돌았는데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도로명이 무척 예뻐서 브레이크를 건 적이 있다. ‘비와야폭포길’.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인터넷 세상 아닌가.

급히 찾아보니 이 마을에 폭포가 있는데 물이 귀하여 평소에는 담담하게 있다가 며칠 큰 비라도 내리면 우람한 폭포로 변한다는 곳이다. 눈 들어 멀리 보니 잔설이 남아 있는 ‘비와야폭포’가 보였다. 그런 경우라면 ‘비와야폭포길’이라는 이름이 어여쁘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런 경우란 많지 않다.

사람살이에 따라 마을도 달라지고 길도 달라진다. 경관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진다. 그러나 그것이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한다. 영문학자 김우창은 “이름을 군번처럼 바꾸는 것이 합리적일까? 이름은 기억하여야 하고 기억을 통해서 구체적인 것들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개편으로 행정의 관점에서 얻는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길게는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기억이 말갛게 사라지는 것을 상쇄할 만한 효과일까. 실로 과격한 도시행정 맹동주의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일산에서 버스 타고 영등포로 나오다보면 쉽게 잊기 어려운 정류장 이름이 들린다. 3단지 앞, 이마트사거리, 백석역, 이렇게 진행되다가 섬말다리, 삼성당, 나루터, 맨들, 행주산성 등의 이름이 들린다. 그 안내방송을 들을 때 나는 ‘신도시 주민’이 아니라 선사시대 이후로 드넓은 강을 끼고 살아온 인류의 한 성원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정윤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