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서울의 이면과 내면 담은 ‘고진감래’

“아름다움만 담긴 홍보 영상은 거짓말이다.” 박찬욱ㆍ찬경 형제가 만든 다큐멘터리에는 서울의 복잡한 양상이 담겨 있다. 희망도 있고 불안도 있다. 밝음도 있고 어둠도 있다. 에너지도 있고 주저함도 있다. 대도시의 쾌속도 보이지만 그 속도 곁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망설임도 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그 시작이 되는 개막식을 눈여겨 보았다. 슬라브 중심주의를 넘어 광활한 두 개 대륙의 모든 소수민족까지 총괄하려는 푸틴 시대의 압도적인 유라시아주의가 개막식 내내 전개되었다. 오랜 역사와 다양한 삶들이 강력한 민족주의 아래 나열된 개막식이었다.

이런 생각을 <경향신문> 2월 11일자 칼럼으로 썼더니, 몇몇 독자들이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국가 행사에 자기들 역사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는 의견이었다. 물론, 그 칼럼에서도 썼듯이 올림픽 개막식은 역사 시간이 아니다.

깜짝 놀랄 만한 구경거리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2008 베이징 올림픽과 이번 소치 올림픽의 개막식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라는 거대한 제국의 강력한 민족주의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강력한 민족주의만 나열해야 할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일종의 ‘대영제국’ 찬가로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개막식 총연출을 맡은 대니 보일 감독은 개막식 2부의 제목을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마저 거대한 물신의 맷돌로 파괴시키는 자본주의를 응시했던 근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따온 제목이다.

광화문네거리 - 2012년 8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모습. / 정윤수

대니 보일 감독은 영국을 대표하는 익숙한 상징들을 배치하면서도, 대영제국의 영광보다는 산업혁명의 폐해, 19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 자메이카 등지에서 건너오는 이주민들의 지친 표정까지 재현했다. 그러니까 누가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기억하느냐가 관건이다.

영국의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은 <반대자의 초상>에서 “한 국가의 역사는 교향곡이나 연속극이 아니며, 플롯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한 점도 이런 맥락이다.

한 도시, 한 국가의 역사를 어떤 관점에 따라 수미일관된 흐름으로 나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영광스러운 일들, 좋았던 기억들, 화석처럼 굳어진 문화 상징들, 도표나 수치로 자랑할 만한 사건들만 나열하게 된다.

도시 속살과 지친 초상까지 오롯이
가령 2008년에 발표된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리버풀의 추억>은 이런 점에서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제대로 다룬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리버풀의 찬란한 문화와 더불어 황량한 뒷골목, 부서진 의자, 쓸쓸한 항구, 남루한 차림의 행인들도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떠나는 병사들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도 보인다. 축구로 유명한 이 대도시의 화려한 밤거리, 그 어수선한 풍경 속 청춘들의 정념도 담겨 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리버풀이라는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보았을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부침을 거듭해온 유럽의 많은 도시들의 지친 초상을 엿보기도 했다.

서울을 그렇게 다룰 수는 없는 것일까. 서울은 언제나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로 시작하는 ‘서울 찬가’로 재현되었다. 거대한 빌딩, 드넓은 한강, 바쁘게 돌아가는 남대문시장, 전통을 간직한 경복궁 등의 이미지가 활기찬 노래에 맞춰 이어지는 ‘서울의 발전상’ 같은 재현 방식은 꽤 오랫동안 그러한 관점이 아닌 시선으로 서울을 다시 보고자 하는 일을 차단해 왔다.

영화 <고진감래>의 한 장면. / 영화화면 캡쳐

다르게 보고자 하는 시선을 불온하다고 내몰기도 했다. 그리하여 서울은 수많은 홍보 이미지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발전’하는 곳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시가 후원하고 ‘파킹찬스’(PARKing CHANce)에서 제작한 도시 다큐멘터리 ‘고진감래’는 전혀 다르다. ‘파킹찬스’는 영화감독 박찬욱과 미디어 아티스트 박찬경, 두 형제의 프로젝트 팀이다.

서울시가 ‘글로벌 마케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해 8월 20일부터 11월 25일까지 서울과 관련된 영상 이미지 공모를 했고, 이에 국내 6523편과 중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 5329편의 작품이 접수됐다.

이 중에서 141명의 영상을 간추려 두 감독이 ‘고진감래’를 만들었다. 그저 괜찮은 이미지를 추출하여 이어붙인 게 아니라 파격적인 음악, 신선한 편집, 닫힌 듯하면서도 무한하게 열려 있는 교차 구성 등으로 연출했다. 유튜브에서 ‘고진감래’를 검색하면 1초 만에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박찬욱 감독은 지난 2월 11일 오후 서울극장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양의적이고 개방적 해석이 가능한 영화”라고 말했다. 과연 이 작품에는 서울의 복잡한 양상이 담겨 있다.

희망도 있고 불안도 있다. 밝음도 있고 어둠도 있다.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다. 에너지도 있고 주저함도 있다. 천만이 살아가는 대도시의 쾌속도 보이지만 그 속도 곁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망설임도 있다. 이를 음악감독 장영규가 이끄는 악단 비빙이 그로테스크하게 이어간다.

박찬욱 감독은 “아름다움만 담긴 홍보 영상은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같은 맥락의 얘기를 얼마 전 영문학자 김우창 선생의 강연에서도 들었다. 그는 “이력서에 쓸 수 없는 일들이야말로 한 개인에게 더없이 중요한 기억들”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소풍 가서 놀았던 일들, 담벼락 밑에 썼던 낙서, 처음으로 초경이나 몽정을 겪었을 때의 난처함과 신비로움, 애틋하게 남아 있는 첫사랑의 추억, 고교 때 울면서 봤던 영화, 누군가의 집 앞에서 서성거렸던 일 등은 이력서에 쓰지 못한다. 그런 것을 기입할 만한 칸도 없다. 묻는 사람도 없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한 사람의 내면세계에 깊이 드리워진 이러한 일들 대신 무슨 상을 받고 어디를 졸업했고 토익 점수가 얼마인지를 기록하게 되는데, 도대체 이런 것들로 한 개인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진감래’를 보면서 이 거대 도시의 이면과 내면, 그 속도와 방향을 더 짜릿하게 직감할 수 있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