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박제화된 ‘4월·5월의 기념비’

4·19와 5·18 기념탑과 기념공원은 전승기념탑이나 고속도로 완공탑 같은 그 흔한 국가주의적 영웅조형물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주도하여 ‘거룩하게, 영웅적으로, 남근적으로’ 재현하는 순간 ‘기념하기 위한 기념’이 되고 만다. 4·19국립묘지에는 4·19가 없고 5·18 기념식에는 5·18이 없다. 역사적 기억이 표백된 영웅적 기념비만이 서 있을 뿐이다.

아홉 살 때쯤 서울로 올라와서 오랫동안 미아리, 수유리, 방학동 쪽에서 살았다. 정겨웠지만, 낡고 오래된 동네였으므로 주택가 부근에는 마땅히 놀 만한 곳이 없어서 북한산 기슭의 산속으로 자주 놀러다녔다. 빨래골, 화계사, 우이동, 그리고 4·19탑. 그랬다. 내가 한창 자랄 때는 그곳을 ‘4·19탑’이라고 불렀다.

그곳에 가면, 연못이 있었다. 아마도 인공으로 조형했겠지만, 오래 전 4·19탑의 연못은 무척 평화롭고 자연스럽고 안온했던 공간이었다. 대체로 오후에 가서 놀았기 때문에 햇살이 은은하게 수면 위를 쓰다듬던 풍경을 보곤 했다. 그곳에서 놀다 보면, 수면까지 가지를 드리운 늠름한 나무 뒤에서 애틋하게 서로 부둥켜 안고 있던 연인들과 당황스럽게 마주치던 일도 있었다. 아름다운 연못이었다.

광주 5·18 기념공원 내의 조형물. | 정윤수

기억의 파편을 소거해버리는 관제시
조금 커서는, 그곳이 고결한 희생과 죽음과 저항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임을 알게 된 후로는, 친구들하고 자주 갔다. 고교 시절에는 그곳에서 최루탄을 많이 마셨다. 인근의 고려대 학생들이 4·19 항쟁 및 ‘4·18 고려대학생 의거’를 기념하여 왕복 15㎞ 정도를 마라톤으로 달리면서 일종의 ‘합법적 시위’를 벌였는데, 그 무렵이 전두환 정권의 절정기였으므로 우이동 일대에 수천의 경찰이 깔리고 결국 최루탄이 터졌다.

고교 1학년 때 그곳에 갔을 때, 산에서, 정말로 산에서 누가 성큼성큼 내려와서는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기인다운 풍모로 4·19 기념탑을 한참이나 보고 큰절을 하고 추모비에 적혀 있는 글을 큰소리로 읽더니, “하하, 이게 무슨 기념이냐, 이게 무슨 4·19 정신이냐” 하던 일이 기억난다. 그 기인은 나와 내 친구를 산으로 데리고 갔다. 지금 헤아려 보니, 4·19 국립묘지 오른쪽의 능선쯤, 그러니까 보광사 쪽인 듯 싶은데, 그곳에서 그는 텐트를 치고 도를 닦고 있었다. 증산도라고 했다. 천지가 개벽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저 4·19탑은 4·19 정신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했다.

꽤 세월이 흐른 후, 1995년 4월 김영삼 정부 시절에 묘역이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일대가 완전히 새로 단장되었다. 신혼살림을 방학동에서 하던 때였으므로 겨우 5분이면 가볼 수 있어서 가서 보았더니, 아! 연못이 없어졌다. 그 자리에 주차장이 들어섰다. 역사적 기억이나 추모의 공간 같은 공적인 관념도 중요했지만 내게는 내 유년시절의 풍경 하나가 사라져버린 것이 우선 씁쓸했다. 그리고 거대한 기념비들, 화강암의 추모비들, 그 거대한 돌덩이 속의 추모시들이 압도했다. 특히 그 추모시 말이다. 일컬어 ‘수호예찬비’라고 한다.

조지훈, 장만영, 송욱, 이성부 등 12명 시인들의 작품이 새겨져 있어 읽어 보았다. 몇 분의 시는 ‘4·19 정신’에 부합하는 시였지만, 대체로는 그 흔한 ‘예송시’요 심지어 ‘관제시’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의 시와 그 삶이 과연 ‘4·19 정신’에 어울리는 것인지 몹시 의심스럽기도 했다. 당시 한국작가회의와 4·19혁명회가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주요 시인들이 빠진 채 진혼가 내지 조가(弔歌) 일색의 추모시편들이 새겨져 있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나는 진짜 4·19 정신과 그것을 기리고 있는 시가 연못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고, 국가가 관제적으로 기념하는 순간, 다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영웅적 기념탑, 높이 치솟은 남근적 조형물, 공허하게 울려퍼지는 추모곡과 전형적인 영웅시, 행사시, 관제시는 기억의 파편과 저항 과정의 상처를 말갛게 소거해버린다.

광주 5·18 기념공원 내의 조형물. | 정윤수

80년대 광주·시민성과 거리 먼 기념
4월이 지나면 5월이다. 그야말로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로 날씨마저 을씨년스럽고 비까지 내리는 그런 5월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지금 비참한 순간을 버티고 있다. 이 5월에는, 저 광주의 ‘5·18 기념공원’을 나는 생각한다. 몇 해 전 그곳을 갔을 때, 나는 ‘기념하기 위한 기념공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온기 없는 기념, 애틋한 정념이 삭제된 기념, 희생의 핏자국과 저항의 목소리가 생략된 기념, 압도적인 크기의 ‘영웅적’ 조형물이 작고 희미하고 간절하고 애틋했던 저 80년의 기억을 모조리 빨아들인 듯한 기념, 그 기념공원은 너무도 낯설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1996년에 정부가 국내외로 공모한 ‘광주 5·18기념 조각공원’에 당선되며 귀국한 조각가 심재현의 작품이다. 한국에너지관리공단, 한국전력공사, 동아생명, 한화, 롯데백화점, 동부금융센터, LG자이, 신성건설, 현대하이페리움, 무주리조트, 경주 국제문화EXPO, 대구신공항 등에 다수의 작품을 설치한 작가다. 나는 이러한 이력 속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 내력은 ‘5·18 정신’과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작가의 내면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어떤 성찰이 한줌도 없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영웅적 기념탑과 장대한 기념공원은 ‘동원된 국민’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이 되기를 꿈꿨던 80년대의 광주 시민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아니 전혀 무관해 보일 정도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팽창할 때 성행했고 일제 때도 유행했으며 해방 이후 최전방의 전승기념탑이나 고속도로 완공비 같은 곳에 창궐했던 그 흔한 국가주의적 영웅조형물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주도하여 ‘거룩하게, 영웅적으로, 남근적으로’ 재현하는 순간 ‘기념하기 위한 기념’이 되고 만다. 기념하기 위한 기념, 관제화함으로써 사실상 박제화되는 기념, 영웅화함으로써 시민성을 표백시켜버리는 기념. 그것이 지금의 4월이요 5월이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국가보훈처는, 그러니까 국가는, 국회가 지정 촉구 의결까지 한 ‘님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을 결국 유보하였다. 이에 ‘5·18 민중항쟁 34주년 기념행사위원회’는 지난 5월 7일, 정부가 주관하는 공식 기념식에 불참하기로 확정했다. 국가보훈처의 5·18 지원금 1억4000만원도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4·19국립묘지에는 4·19가 없고 5·18 기념식에는 5·18이 없다. 역사적 기억이 말갛게 표백된 영웅적 기념비만이 서 있을 뿐이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