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읍내 가게나 다방도 거의 사라지고 대형마트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동네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모심기를 하고 참을 먹고 한바탕 웃기도 하는 그런 모습은 오래 전의 기억일 뿐이다. 이제 ‘시골’은 완전히 옛 세대의 기억의 박물관으로 사라져버렸다.
시인 김사인은 진짜 시인이다. 국문학과를 나왔고 일찌감치 등단하여 어느덧 시업 30년을 넘긴, 현대문학상이며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진짜 시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나만의 각별한 애정과 존경의 표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시를 쓰고 있고 해마다 수많은 문예지와 공모전을 통해 수십명씩 등단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문학의 밤이며 시인과의 대화며 시쓰기 강좌가 열리고 있으니 언필칭 시인이라 칭하는 자는 수천을 헤아리는 ‘시인 공화국’이지만, 그래도 ‘진짜 시인’이라고 존경할 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의 다방 | 정윤수
그 중에서도 우스꽝스러운 작태는 시인입네 하고 겉멋 부리면서 이런저런 행사, 심사, 공모 같은 곳에서 서푼어치 장광설에 돼먹지 않은 헛말을 부려가며 진실로 순수한 아마추어들의 시에 대한 순정을 마음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관변 시인’, ‘제도 시인’, ‘직업 시인’들이 있으니, 그런 하수들에 비할진대, 시인 김사인의 시적·인간적 가치는 밤하늘의 또렷한 별만큼이나 찬란하다. 그의 시 중에 ‘아무도 모른다’가 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내 과거의 마을과 동네와 골목을 풍경처럼 본다. 특히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이라는 표현에서는 평생 큰소리 한 번 치지 않으시고 늘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풍요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내가 MBC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면서 놀랐던 것은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반말을 예사로이 쓰고 이름을 함부로 부르던 장면이다. 아마도 동네어른들의 친숙한 우애를 보여주려고 했겠지만, 적어도 내가 자란 경북 영주 숭흥면의 깊은 산골에서조차 그런 풍경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동네어른들은, 어떻게 보면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관계인데도, 늘 존댓말을 썼고 상대방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누구네 집에 가서 전해라”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고 늘 택호를 써서 “우곡어른 댁에 다녀 오너라”고 하셨다. 그런 옛 공동체가 ‘런닝구와 파마자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시대였다.
오늘날 그러한 세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만약 오늘날의 아파트 단지에서 동네어른들이 런닝구에 파자마 바람으로 어린이 놀이터에서 한참 앉아 있으면 ‘이상한 사람 있다’고 신고를 받을지 모른다.
경기 가평군 대성리에 위치한 방치된 건물 | 정윤수
도시의 번잡함을 따라가기 바쁜 마을들
시골이라 해서 다를까. 일상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면 아마도 그러한 옛 공동체의 생활 습속과 정겨운 우애의 관계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숨가쁘게 변하는 세태에 의하여 군소도시와 소읍과 작은 마을들 역시 외적인 풍경이나 내면적인 생활까지 급변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예컨대 2014년 2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인간적인 삶의 풍경을 다루는 KBS 일요 드라마 <산너머 남촌에는2>의 제작진이 촬영 때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풍요로운 시골의 정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푸근한 삶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풍경이 거의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촬영 때마다 고충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 드라마는 낭만화된 가공의 농촌이 아니라 오늘의 농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랬는데, 시청자들이 외면을 하였고 더러는 항의까지 했다고 한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농촌은 저 60·70년대의 풍경으로 결착되어 있다. 과거의 기억 속에 결착된 낭만화된 시골의 풍경, 그것을 위하여 제작진은 오늘의 실제 농촌에서 현장 로케로 촬영하는 것은 사실상 포기했다는 것이다.
진짜 시인 김사인의 ‘아무도 모른다’는 이렇게 끝이 난다.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그 많던 읍내 가게나 다방도 거의 사라지고 대형마트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동네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모심기를 하고 참을 먹고 한바탕 웃기도 하는 그런 모습은 오래 전의 기억일 뿐이다. 지방의 군소도시들 풍경이 하나같이 서울을 따라하고, 또 그 부근의 소읍들도 군소도시를 따라하고, 면소재지 이하의 작은 마을들도 소읍의 번잡한 풍경을 숨가쁘게 쫓아가야만 하는 상황. 이제 ‘시골’은 완전히 옛 세대의 기억의 박물관으로 사라져버렸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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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