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가 만난 사람]‘시민사회의 큰형님’ 윤준하 6월민주포럼 대표

“시민사회 ‘전투모드’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게 뭡니까?” 그는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행운의 종’이라면서 파는 작은 종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그것을 탁자에 놓고는 앞으로 밀었다. 손으로 들어올리니 그것이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절 처마에 매달린 풍경처럼 은은한 소리를 냈다.
“소리가 참 맑고 아름답지 않아요?”
정말 그랬다. 표면의 모양으로 봐서는 수제품인 듯했다. “아, 그렇군요”라고 하고는 돌려주려는데 그의 손에 또 하나의 종이 보였다.
“여기 오다가 두 개 샀어요.”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만난 윤준하 6월민주포럼 대표는 뜬금없이 기자에게 종을 선물했다. 무슨 의미일까. “제게 주는 겁니까” “왜 주는 거죠”라고 물었지만 대답이 신통찮다. 그냥 소리가 좋단다. 어쨌든 선물은 즐겁다. 종을 앞에 끌어다 놓고 수첩을 꺼내 들었다.

윤 대표를 인터뷰하게 된 것은 천안함 사건과 4대강 사업을 계기로 시민사회 단체가 ‘전투모드’에 돌입한 것처럼 보여서다. 이런 분위기를 전하는 이벤트가 최근 연이어 있었다. 6월 15일에는 ‘4대강 사업 중단을 위한 정계·종교·시민사회·학계·문화예술계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가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메트로홀에서 열렸다. 16일에는 전국 202개 시민사회 단체 연명으로 ‘참여연대의 안보리 서한 발송에 대한 정부의 마녀사냥식 탄압 중단’을 촉구하고 ‘천안함 사건 진실 규명 및 국회 국정조사 실시’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개최됐다.

이 두 행사는 물론 시민사회 단체의 크고 작은 모임에 가 보면 늘 그가 있다. 원로 모임이든 젊은 활동가의 회합이든 뭔가 얘기가 될 만한 자리라면 십중팔구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운동가이자 활동가이며 후원자이기도 한 그를 만날 기회는 많았지만 단 둘이 차를 마시면서 정색하고 대화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안함 사태다, 4대강 사업이다 해서 분위기가 험악합니다. 시민사회의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시민사회는 이명박 정부를 인정했습니다. 민주적 틀에 의해 구성된 정부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이 정부가 과연 민주정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어요. 대치국면, 다시 말하면 ‘전투모드’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민주주의가 1987년 6월항쟁 이전으로 후퇴했다는 겁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운하가 안 되니까 4대강 사업이라는 새로운 걸 들고 나왔잖아요. 그렇다면 국민에게 물어 봐야죠. 국민은 모르고 자기는 아니까, 그리고 국민에게 위임받았으니까 한다는 식으로 하면 안 되죠. 70%가 반대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고…. 우리가 민주주의의 덫에 걸렸다고 했어요. 선거 때 표만 찍고 5년 동안 아무것도 못하니까요. 반민주가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행세하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전투모드’로 들어간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데모하고 싸우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어 참 안타깝습니다. 그 원인 제공은 현 정부가 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운하를 만들자고 했습니까, 4대강 사업을 하자고 했습니까. 대통령이 제안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해결하고 책임져야 하는 거죠.”
이와 관련해 연석회의는 정부에 4대강 사업의 즉각 중단과 대안 마련을 위한 범사회적 논의기구 구성, 국회에 4대강 사업 검증 특별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했다. 또 이를 관철하기 위해 국회에서, 거리에서, 지역에서, 공사 현장에서 중단 운동을 벌여 나갈 것을 결의했다. 7월 3일 4대강 사업 중단 국민대회와 17일 문수 스님 소신공양 사십구재 시민 추모 문화제도 예고했다.

그런데 시민사회단체가 예전처럼 국민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동력의 불씨는 있다고 봅니다. 불씨를 살릴 바람을 불어넣어야죠. 우리 세대는 학생운동을 하면서부터 싸운 경험이 있고, 젊은 세대는 제도 속에서 어떻게 보면 순하게 커 왔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 사람들보고 싸우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는 거죠. 아주 묘한 상황이에요.”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시민사회 내부 문제로 옮아갔다. 윤 대표는 고려대 민주수호투쟁위원장으로 3선개헌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전국반독재학생총의 의장으로서 1971년 교련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그가 시계탑에 올라가 시위를 주동하면서 전개된 두 차례의 격렬한 투쟁은 고려대 학생운동권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그를 직접 만나 보기 전까지 기자는 ‘윤준하’ 하면 매우 ‘터프’한 사람을 떠올렸을 정도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싸운 학생운동 세대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른바 ‘활동가 세대’가 주축을 이룬 지금과 같은 시민사회에서 강력한 리더가 탄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명박 정부 들어 시민사회 단체는 활동마저 상당히 위축된 상황이다. 6월민주포럼은 시민사회 또는 진보 진영, 나아가 야권 전체의 리더십 부재에 대한 고민을 특히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진다.

시민사회 스스로 리더를 키우는 데 인색했던 것은 아닙니까.
“6월민주포럼 같은 경우는 어떤 주체가 되기보다 교량적 주체, 다시 말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기로 하고 많은 토론을 했지요.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기존 정치인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수준에 머물렀지 스스로 새로운 리더를 만들어 내는 노력에는 게을렀다는 거예요. 제 개인 생각이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작업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운동 속에서 커 온 사람, 몸으로 겪었고 몸에서 나온 철학이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해요. 누가 있을 것 같아요. 신 기자가 좀 추천해 보세요.”

6월민주포럼은 6월항쟁 10주년인 1997년부터 ‘6월사랑방’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돼 온 옛 재야 인사들의 모임이다. 윤 대표를 비롯해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운영위원장), 최열 환경재단 대표, 정상모 전 MBC 논설위원,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정대화 상지대 교수, 오충일 목사, 이석태 변호사 등 40여 명이 참여하고 있는 가운데 포럼·세미나·음악회 등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고 중요한 시국 사안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의견을 밝혀 왔다. 지난해 3월부터는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사랑방’에서 지금의 ‘포럼’으로 이름을 업그레이드했다.

리더라는 게 누가 키운다고 커지는 게 아니라 활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상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시민사회는 책임지는 구심이 없는 것 같아요. 전부 공동대표이고 공동위원장, 그런 식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논의 구조만 있고 책임 구조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리더가 나오기 어렵죠.

“저는 자원봉사 개념으로 하지 직업운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운동가와 활동가는 구분된다고 봐요. 운동가는 평생 동안 어떤 가치를 희구하면서 현재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활동가는 어떤 영역 속에서 단순히 봉사하는 겁니다.”

“시민사회에서 사람을 키우긴 키웠죠. 최열 환경재단 대표라든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라든가 초기 시민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왔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리더로서) 꿈을 보이는 것을 굉장히 민망하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 주변의 구조도 그렇게 짜이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그런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봅니다.”

리더를 키우는 구조라는 게 어떤 것입니까.
“이미 나와 있는 사람을 몇 분 선정하거나 여론을 모아 그런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도 마찬가지예요. 확실한 리더가 없으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요. 6월민주포럼이 중심이 되어 시민사회와 야권 전반을 대상으로 허심탄회하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입니다. 향후 5년의 정국에 대해서는 물론 남북 문제, 평화 문제까지….”

향후 5년의 정국에 대한 논의는 2012년 대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로서는 이명박 정부는 물론 야권의 리더십도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사회 내부에서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일 터다.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하는 데 시민사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윤 대표와 6월민주포럼의 생각인 듯하다.

새로운 리더십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까.
“저는 한반도를 비핵지대가 아닌 무핵평화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부터 그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거죠. 산업도 지금처럼 자본 개념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고 우리가 처한 환경에 맞게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윤 대표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국가·사회의 상과 비전을 길게 설명했다. 제한된 지면에 담기 힘들고, 그렇다고 짧게 요약하기도 어려운 내용이다. 뭉뚱그리면 환경·평화·생명·미래의 개념을 담고 있다. 그는 공해추방운동연합 시절부터 20년 넘게 환경운동에 몸담았다. 페놀 사태, 핵 폐기장 건설, 새만금 갯벌 매립 등 대형 환경 사건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운 전력이 있다.
직업적으로 운동하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생업을 갖고 수십 년 운동을 계속하는 것은 어찌 보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윤 대표는 개인 사업을 하면서 직업운동가 못지않게 열심히 운동을 한 대표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그를 지칠 수 없게 만드는 것일까.

교수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도 아닌데 사업을 하면서 운동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지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조직이나 운동이 잘나갈 때는 괜찮아요. 조금만 거들어도 되니까요. 운동이 어려운 국면인 때는 맡은 직책에 따라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우선 시간을 많이 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 말고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많아요. 통역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 등 자원봉사하는 분들 말이죠. 그들에 비해서는 저는 편하죠. 직장에 매인 것도 아니고 시간만 내면 되니까….”

그래도 한두 번도 아니고 평생 쉬지 않고 하는 게 놀랍습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운동이라는 건 가치가 있잖아요.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제가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게 새만금이에요. 근 10년을 싸웠잖아요. 결국 막아 내지 못했지…. 사라져버린 수경 스님과 저, 그리고 문규현 신부와 생명평화연대를 끌고 가면서 못 막아낸 게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어요. 지금도 문득문득 눈물이 나요. 저는 아름다운 국토, 자연, 통일, 생명, 평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세로 그런 것 때문에 자원봉사를 하는데 그게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잠시 말을 멈춘 뒤) 그게 안타까워서 하는 건지도 모르죠.”

윤 대표가 학생운동가로서 각인된 터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알게 됐지만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건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기업을 하는 사람도 이제는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다. 기업이 사회 전체에 기여하려는 책임의식을 지닐 때 사회가 밝아지고 스스로 존중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노동자도 마찬가지예요. 노동조합이 이제는 무슨 운동을 해야 하냐면요, 노동자들의 평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요. 대기업만이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부가 몰려 있어요. 대기업 노동자는 하청기업 노동자, 나아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자기 조합원들의 복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권리 이후에는 사회에 눈을 돌려야 해요.”

리더십 문제도 얘기했는데, 스스로 정치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옛날에 했죠. 학교 다닐 때는 농담이겠지만 주변에서 기대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는 정치보다 사회 안정이 더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사회운동에 더 가치를 둔 거죠.”

주변의 권유나 정치권의 제의가 있지 않았습니까.
“서울 강남과 성북에 출마하라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어요. 서울환경운동연합 의장을 할 땐데, ‘나는 시민운동으로 들어왔다’라고 말하고 끝냈죠. 국회의원에 대한 매력도 없었고, (정치권이 추구하는 세상이) 제가 추구하는 세상과 달랐어요. 집사람 고생도 너무 시켰고….”

보기보다 소심하달까, 아니 소박한 마음을 지닌 것 같습니다.
“세상이 참 복잡하더라고요. 그래도 전 간단하게 산 사람입니다. 원래는 성격이 낙천적이 아니었는데 겪으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심각한 성격이고 내성적이었는데… 바뀌더라고요, 그게.”

시민사회의 분위기나 풍토도 시대 변화와 더불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선배 운동가로서 할 말이 있다면….
“제가 후배 활동가들한테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운동은 운동답게, 조직은 조직답게, 사람은 사랍답게’예요. 운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해, 사람이 필요해, 조직이 필요해 이것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운동의 내용이 없어지고 나중엔 관리만 남죠. 다 좋아요. 사람도 있고 다 있는데 운동이 실패했어? 그런데 사람도 없어져? 아, 그거 내가 한때 몸담았던 곳… 그렇게밖에 안 된다면 곤란하죠.”

신동호가 만난 사람

운동가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자원봉사 개념으로 하지 직업운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운동가와 활동가는 구분된다고 봐요. 운동가는 평생 동안 어떤 가치를 희구하면서 현재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활동가는 어떤 영역 속에서 단순히 봉사하는 겁니다. 후배들한테는 운동가가 되라고 하지만 사실 저 자신도 운동가인지 활동가인지 잘 모르겠어요. 중간에 있다고 할까….”
인터뷰를 마치려는데 탁자 위의 종이 눈에 띄었다. 다시 물어 보았다. “이게 뭡니까?” 그는 “경종이라고 하던가…”라며 말끝을 흐렸다. 손끝이 흔들리면서 맑은 소리가 퍼졌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소리로 영혼을 깨워 주는 경종. 그는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글·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