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를 대표하는 시계 명가 바쉐론 콘스탄틴 하면 필자는 우선 지난 2005년도에 공개된 그들의 한 홍보용 영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비밀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타이틀의 해당 영상에는 말끔한 차림의 한 중년 남성이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를 가지고 제네바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차분한 내레이션과 함께 이어지는 영상 끝에 그 신사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본사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시계를 수리하고, 그 시계를 마침내 다시 손목에 착용한 뒤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건물을 나선다. 이 단편적인 영상 속에서 바쉐론 콘스탄틴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바로 대를 잇는 전통과 기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다.
1755년 장-마크 바쉐론에 의해 설립된 바쉐론 콘스탄틴은 올해로 무려 2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시계 브랜드로서는 가장 유구한 역사에 속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한시도 단절된 적 없이 지금까지 꾸준히 시계를 제작해왔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스위스 고급시계를 상징하는 명가 중의 명가이자 제네바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영상 속에서도 드러나듯 바쉐론 콘스탄틴은 그 긴 세월 속에서도 자사에서 생산한 모든 시계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되고 낡은 시계일지라도 이를 다시 완벽하게 수리·복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 패트리모니 트레디셔널 오토매틱
바쉐론 콘스탄틴은 또 시계 제작의 대부분을 장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작업으로 소화하는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인스턴트 문화, 트렌드에 발맞춰 빠르게 소비하고 폐기하는 패스트 문화가 팽배한 요즘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바쉐론 콘스탄틴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천연기념물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신사들 유혹하는 고혹적 매력
바쉐론 콘스탄틴에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기들이 제작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1955년 직경 21.05㎜·두께 1.64㎜로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얇은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로 회자되는 칼리버 1003과 이를 탑재한 울트라씬 시계는 특별하다. 이 역사적인 시계는 훗날 드레스워치 디자인의 전설이 되었고, 현대의 바쉐론 콘스탄틴을 대표하는 컬렉션인 패트리모니 시리즈로 이어진다.
수공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울트라씬 칼리버와 패트리모니의 미려한 골드 케이스는 더할 나위 없이 클래식했고 우아한 조화를 이뤘다. 여기에 1880년부터 브랜드를 상징하는 심볼로 사용되기 시작한 말테 크로스가 양각으로 부착된 다이얼은 특유의 미니멀한 디자인과 고혹적인 매력으로 세대를 걸쳐 상류층 신사들을 유혹해왔다.
패트리모니의 등장은 앞서 연재에서 소개한 파텍 필립의 칼라트라바와도 여러 면에서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두 시계 모두 시와 분, 혹은 추가로 초까지만 표시되는 지극히 단순한 디자인으로 시작했고, 이를 하나의 스타일로 밀고 나가 하이엔드 드레스워치의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패트리모니 컬렉션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광대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트레디셔널과 컨템퍼러리로 크게 양분화된 패트리모니 컬렉션은 가장 베이직한 타임온리 모델에서부터 복잡 시계를 대표하는 월드타임·크로노그래프·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을 비롯해 고급시계 기술의 종착역이라 할 수 있는 투르비용과 미닛 리피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가지를 치고 있다.
전기 조명이 출현하기 전인 18세기 초 어둠 속에서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소리를 통해 시간을 알려주는 미닛 리피터가 발명된 이래, 손목시계 형태로 미닛 리피터 기능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 구조상 무브먼트는 물론 시계 전체의 두께가 상당히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패트리모니 트레디셔널 14-데이 투르비용
고로 미닛 리피터 시계들은 대체로 크고 두껍고 실상 착용감이 좋지 않아 착용을 위한 시계라기보다는 일부 고급 컴플리케이션 애호가들을 위한 감상용 내지 수집용 시계 정도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바쉐론 콘스탄틴이 올해 선보인 패트리모니 미닛 리피터 시계는 무브먼트 두께가 고작 3.9㎜에 시계 두께 8.9㎜로 등장과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얇고 우아한 미닛 리피터로 군림하게 되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시계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숨은 요인으로는 제네바 인증(Hallmark of Geneva)을 들 수 있다. 제네바 인증은 무브먼트와 관련된 크게 12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부품의 품질에서부터 이를 얼마나 정밀하고 가시적으로 아름답게 다듬었는가 하는 미적인 요소, 또한 전체 설계적인 기능의 완벽함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의 승인 과정이다.
스위스 연방정부에 의해 선출된 관련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하나의 무브먼트를 두고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에 걸쳐 테스트하고 심사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제네바에서 제작된 고급시계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하고 엄격한 테스트인 셈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이 제네바 인증에 그 어떤 브랜드보다 빠르게 자발적으로 참여해 왔다. 그만큼 자사 생산 시계와 무브먼트에 대한 자긍심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미닛 리피터 선보여
기계식 시계의 메커니즘에 크게 관심이 없는 이들이 보기에는 이토록 단순하게 생긴 시계에 무슨 대단한 기능과 특별함이 잠재돼 있을까 하고 반문하기 쉽지만, 고급시계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는 이렇듯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부품들 하나하나와 이를 조화롭게 만든 장인의 숙련된 손길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매뉴팩처 내에서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제작팀에서 일할 수 있는 장인이 되려면 다른 공방에서 최소 15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야 하며, 미닛 리피터 시계처럼 고도의 기술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을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또 별도로 다년간의 수련기간이 요구된다고 하니 자체 장인을 관리·양성하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철저함 또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13년간 약 37억원가량의 세금을 체납한 모 그룹 전 회장의 가택을 압수수색한 결과 바쉐론 콘스탄틴의 투르비용 시계가 금고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몇 장의 사진만으로는 정확한 모델명이나 연식을 판단하기 힘들었지만 해당 시계는 대략 십수년 전에 제작된 시계로 보인다.
현행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 중에 디자인이나 기능상으로 가장 비슷한 시계를 꼽자면 패트리모니 트레디셔널 14-데이 투르비용 엑설런스 플래타인을 들 수 있다. 전체 플래티넘 케이스에 시·분·파워리저브·투르비용이 표시되는 시계로, 풀와인 딩시 14일간이나 멈춤 없이 작동하는 자동 칼리버 2260이 탑재돼 있다. 물론 이 무브먼트 역시 까다로운 제네바 인증을 받았으며, 시계의 국내 리테일가는 무려 4억원을 호가한다.
바쉐론 콘스탄틴 정도의 최고급 시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어떤 물건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 물건을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인품과 평소의 행동거지다. 오랜 전통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자랑하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시계를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 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이가 아닐까.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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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국민이 바뀌란 소리냐?
대통령 말씀에 또 답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