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조선 왕손의 ‘진정한 광복운동’

고종 증손자 이초남씨 원폭피해자 유골반환·왕실복원 추진 ‘심혈’

매년 8월 15일이 되면 비운의 조선 황제 고종의 증손자인 이초남씨(62)의 마음 속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이우(李)공과 어머니 유정순씨가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꿈에 그렸을 광복을 기념하는 날이면서 아버지 이우공의 장례식을 치른 날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픈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의 아버지인 이우공은 1912년 순종의 동생인 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왕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종이 세상을 뜬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했으나 만주 안둥에서 발각돼 국내로 송환됐는데, 당시 그가 국민에게 전한 글에는 울분과 반일정신이 잘 드러난다. 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광무황제 폐하의 비밀명령을 받들어 바로 일어나려 했으나 무수한 가시밭에서 만신창이가 될 것을 생각하여 이를 숨기고 수행하지 못했다. 세상에 있기 어려운 아주 흉측한 무리들이 광무황제를 독수로 시해했도다. 이제 나는 앞의 함정도 뒤의 채찍도 돌보지 아니하고 궐기하였노라.”

아버지 이우공 역시 반일정신 투철

의왕은 국내에 감금된 뒤에도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어느날 그는 궁에서 술에 취한 듯 “기생을 불러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바로 밖에서 지키는 일본 경찰 들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의왕은 난봉꾼으로 알려져 있었던 까닭에 그가 소리를 치면 곧 기생을 태운 인력거가 도착한다. 그런데 그 인력거꾼이 바로 독립운동가였다. 인력거꾼이 가져온 비밀 메시지는 이우공의 어머니인 수인당을 통해 의왕에게 전달된다. 의왕은 메시지에 답을 하거나 혹은 두둑한 자금을 주었다.

이런 광경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이우공 역시 반일정신이 투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의 왕족은 일본 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이우공도 마찬가지였다. 10살 때인 1922년 일본에 끌려가 3년 뒤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29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지내던 어느날 이우공은 식당에서 배식을 기다리던 동기생 이형석에게 큰 목소리를 내서 우리말로 말을 걸었다. 순간 일본인 생도들의 눈이 이우공에게 쏠렸으나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말 사용으로 문제가 되자, 큰형인 이건공이 이우공에게 왜 분란을 일으키느냐고 꾸짖었을 때도 이우공은 “형님은 씨도 배알도 없소”라고 맞받아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반일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그의 결혼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왕족은 일본 여성과 결혼해야 했다. 이우공의 작은아버지 격인 영왕이나 이우공의 형도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당연히 그도 일본 여성과의 결혼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자신이 7살 때 고종이 결혼하도록 정해준 조선의 여성이 있다는 이유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박영효가 중재에 나섰다. 자신의 손녀와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대안을 제시한 박영효는 거액의 뇌물을 바치고 난 뒤 허락을 얻어냈다. 1929년 5월 3일 이우공은 도쿄에서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다.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2년 뒤인 1942년 중국 산사성 태원으로 전출되면서 독립군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결국 그의 탈출계획이 들통나 일본 히로시마로 소환당하고 말았다. 1945년의 일이다.

이우공의 정혼녀였던 유정순은 비밀리에 이우공을 만났다. 남녀관계로 만난 것만은 아니었다. 유정순의 아버지 유동렬 장군은 고종의 명을 받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유정순은 의왕과 이우공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 아버지인 유 장군에게 전달했다. 간호사나 승려, 장사꾼 등으로 변장해 일본측의 감시를 따돌리곤 했다.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유씨는 시아버지인 의왕이 건네준 거액의 자금을 임산부인 척 배에 숨기고 유 장군이 있는 중국으로 향했다.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리자 몸에 지니고 있던 토끼피를 치마 속에 뿌려 출산이 임박한 것처럼 속여 감시를 따돌렸다는 것이다. 새우젓 장수로 위장했을 때에는 새우젓 아래에 자금을 숨기고 장사를 하면서 중국으로 이동했다.

이우공과 정혼녀 유정순 사이서 탄생

유씨가 이초남씨를 잉태한 것은 이런 와중이었다. 그러나 이우공은 아들의 탄생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전황이 불확실한 상황에 자칫하면 아들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시나가와에 살고 있는 충복에게 이들 모자를 부탁한 뒤 가끔 모자를 찾아왔다. 1945년 8월 5일 밤 이우공은 아들의 두번째 생일을 맞아 모자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히로시마에 있는 일본군 부대로 출근하다가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조선으로 넘어와 8월 15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이초남씨는 이런 사실을 철들기까지 까맣게 몰랐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왕실 탄압을 우려한 어머니 유씨가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17세가 되던 1960년의 어느날, 어머니가 그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3·15 부정선거 여파로 시끄럽던 무렵 이씨 모자는 서울 운현궁에 거주하던 박찬주씨를 찾아갔다. 정당한 핏줄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유씨는 병을 얻어 사망했고 이씨는 핏줄을 찾아나섰다. 그의 노력은 곧 의왕의 다른 자녀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우공의 셋째 아들이 됐다.

이초남씨는 아버지 이우공이 원폭으로 사망한 사실에 주목한다. 17살 때 자신의 뿌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이후부터 그는 원폭에 대한 관심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대한적십자사에 근무하면서 원폭복지사업소장을 자청한 것도 그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가 일본적십자사에 내놓은 돈을 대한적십자사가 받아 복지사업에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살아남은 자는 치료도 해주고 최근에는 원호수당까지 지원하고 있지만 원폭으로 사망한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상도 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그는 한 사찰의 도움을 받아 해마다 원폭피해 사망자를 기리는 위령제를 열고 있다.

그는 우선 우리나라와 일본의 평화적인 미래를 위해서 일본이 일본내에 있는 원폭 피해자의 유골과 위패를 스스로 돌려주도록 요구할 생각이다. 또한 우리 정부에도 움직임을 촉구할 생각이다. 1단계가 성공하면 원폭 피해자 뿐 아니라 일본에 끌려가 억울하게 죽은 이들, 전쟁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이들의 유골 반환운동을 벌일 생각이다. 그는 “아버지 이우공의 위패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당초 올해부터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일 생각이었으나, 황세손 이구씨가 사망하면서 미뤄지게 됐다. 운동의 적기가 8월 한달인데, 장례로 인해 운동을 벌일 만한 여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서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한 부친

원폭피해자 유골반환 운동을 벌이는 한편, 십수년간 벌여왔던 왕실복원운동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그에게 이 두 가지 운동은 진정한 광복운동인 셈이다. 그는 10여년동안 삼촌인 이석씨와 함께 왕실복원운동을 벌여왔다. 1990년대 중반께 왕실의 복원을 다룬 신문기사가 쏟아진 것은 이들의 노력 덕택이다. 노래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로 유명한 이석씨가 대외적인 활동을 했다면 이론적인 뒷받침은 이초남씨가 맡았다고 한다. 이씨는 “대한제국은 한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일제의 강제로 문이 닫혔고 일제가 쫓겨난 뒤에도 어떤 구체적인 논의도 없이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일단 왕실을 복원한 뒤 국민에게 물어, 국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유지하고, 필요없다고 하면 없애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일단 왕실을 복원해 마무리를 짓는 것이 정당한 절차라는 것이다.

여기서 왕으로 적합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나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으로 적절한 인물은 존재했다. 의왕의 동생이자 황태자로 봉해진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였다. 그러나 그는 지난 7월 16일 일본의 한 지방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였다. 문제는 후손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의왕의 손자인 이원씨(44)를 양자로 정했다. 이초남씨에게는 사촌동생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논란이 존재한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양자를 정한다는 왕가의 법도를 어기고 문중에서 양자를 정했기 때문이다. 과거 후손이 없는 철종의 대를 고종이 이은 것도 당시 최고 어른인 조대비가 지명했기 때문이다. 이석씨가 양자선정 과정에 “우리(의왕의 자손)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양자를 들이느냐”고 강력하게 반발한 것은 그래다. 이석씨는 국내에 거주하는 왕실 후손 중 남성으로는 가장 어른이다.

조명

이와 같은 논란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초남씨는 왕을 정하는 경우라면 가장 적통인 인물 몇명을 선정해 국민투표 등의 수단을 통해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왕실복원을 주장하는 것은 단절됐던 과거 역사를 제대로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국가에도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왕이 존재하면 국민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생긴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반도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북쪽과 남쪽의 화해에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게다가 왕실이 외교·경제사절단으로 활동하면 더큰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본다. 그는 입헌군주제의 장점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운동을 곧 시작할 계획이다. 이씨는 “과거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조선을 망하게 한 주범으로 왕실을 비난하는 국민도 많았지만 요새는 입헌군주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국민이 늘어난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재용 기자 jjy@kyunghyang.com>